대법원이 보낸 스파이? 부조리극 주인공 된 '헌재 파견 판사' - 한겨레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14. 헌재 파견 판사의 숨은 임무“인사 평정권자는 법원행정처
민감·중요한 헌재 정보 넘겨라”
대법원 요구에 최희준 파견 판사
대통령 탄핵 자료 등 325건 유출
두 기관 정보 교류 창구 없어
파견 판사가 소통 담당했다?
“용기 내 거절했더라면 후회”
2015년 헌법재판소 파견 판사들에게 민감하고 중요한 헌재 정보를 대법원에 전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018년 8월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제가) 부조리극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불안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안 할 수는 없는데, 양쪽 기관에서도 사실은 저를 다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중략) 제가 중간에 끼어 있었던 셈입니다.”
부조리극은 불합리한 상황에 놓인 인간 존재의 근원을 묻는 연극 장르다. 지난 18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최희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자신을 부조리극 주인공에 빗댔다. 최 부장판사는 헌법재판소(헌재) 파견 근무 시절 대법원 법원행정처 지시를 받아 헌재 내부 자료와 정보를 대법원에 전달한 인물이다. 그는 대법원과 헌재 사이 ‘소통창구’ 역할을 맡아 헌재 쪽에서는 ‘법원 스파이’로 불린 ‘애매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되돌아봤다.
최 부장판사는 2015년 2월부터 3년 동안 헌재 부장연구관으로 파견근무를 했다. 대법원장은 다른 기관으로부터 판사 파견 요청을 받으면 기간을 정해 보낼 수 있다. 헌재에 파견된 판사들의 주 업무는 사건 연구지만 최 부장판사에게는 특명이 하나 더 주어졌다. 헌재 내부 기밀을 대법원 쪽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친정 위해 노력해야”
2015년 3월 말 혹은 4월 초 어느 점심. 서울 종로구 헌재 인근의 한 식당에서 최 부장판사는 당시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강형주 법원행정처 차장을 만났다. 다른 헌재 파견 판사들도 동석했다. 최 부장판사는 “당황할 정도로 혼이 났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강 차장이 법제사법위원회에 급한 일이 있다고 자리를 뜨자, 이 상임위원이 헌재 파견 판사들에게 말했다.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최희준 부장에게 바로 전달하세요. (인사)평정권자는 법원행정처 차장입니다. 잊지 마세요.”
분위기는 급격히 가라앉았다. 최 부장판사는 이 상임위원의 당부를 법원행정처 차원의 요구로 받아들였다. 앞서 그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에게 인사를 갔다가 예상치 못한 쓴소리도 들었다.
“법원 판사라는 것을 잊지 말고 헌재에 가서도 헌재 논리에 경도돼선 안 된다.”(양승태)
“검사들은 친정인 법무부나 대검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는데, 헌재 파견 판사들이 헌재에 동조해 한정위헌(법원의 법률 해석이 헌법에 어긋날 경우 헌재가 제동을 거는 결정으로 대법원은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이 대법원 위상을 떨어뜨린다고 우려) 의견을 (위에) 보고한다더라. 잘못된 것이다.”(박병대)
헌재의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라는 이 상임위원의 지시가 개인이 아니라 법원행정처 차원의 요구였다는 게 최 부장판사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박 전 처장과 양 전 대법원장의 관련 지시가 대법원 내부 문건과 이 상임위원 수첩에 남아 있다. 이 상임위원이 2015년 2월27일 작성한 ‘헌법관련 업무보고 문건’에는 “파견 법관을 활용하되 보안에 유의해야 한다. 적극적이고 융통성 있는 법관을 활용해야 한다”는 박 전 처장의 지시사항이 적혀 있다. 비슷한 시기(2월25일) 이 상임위원의 업무수첩에는 양 전 대법원장 지시사항을 기록한 ‘大(대법원장), 연구관들, 완충역할, 정보역할’이라는 대목도 나온다. 헌재 정보를 파견 판사로부터 잘 입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대법원은 최고 법원의 위상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는 헌재를 지속적으로 감시·견제했다.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내려 법률 해석의 권한을 넘보고, 법원 판결을 헌재의 헌법소원 청구 대상에 포함시키는 재판소원으로 대법원의 위상을 흔들까 우려했다.
최 부장판사는 이 상임위원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자신의 활동을 최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엔 조심스럽게 (요구)하셨는데, 자꾸 (정보를) 달라고 하시니까 점점 예삿일이 돼버렸다”고 했다. 헌재 부장연구관은 접근 가능한 정보의 폭이 넓은데다 최 부장판사는 재판관들과 식사 중 나눈 이야기까지도 정리해 보고했다. 헌재 헌법연구관 보고서뿐만 아니라 재판관 평의 내용, 헌재 주요 정책에 관한 헌재 소장 및 재판관 의견 등이 이메일을 통해 대법원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대법원이 전원합의체에서 유죄 판결을 했던 현대차 비정규노조 업무방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2년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파업에 적용된 업무방해죄에 관해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2015년 4월 최 부장판사는 헌재 재판관들의 평의가 한정위헌으로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이 상임위원 쪽에 전달했다. 이 밖에도 헌재 사건 10여건이 보고 대상에 포함됐다. 특히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기록도 고스란히 넘어갔다. 정치 상황이 엄중한 만큼 도청 방지 장치까지 설치해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려 애쓰던 차였다. 기록 주요 부분, 의견서, 준비서면, 고영태씨 녹취록 등 중요 자료까지 최 부장판사의 손을 거쳐 이 상임위원에게 파일 형태로 전달됐다. 이런 방식으로 대법원에 건너간 정보가 헌재 내부 정보자료 194건, 사건 동향 정보 131건 등이다.
이 상임위원은 최 부장판사한테 건네받은 정보의 사용처는 말하지 않았고, “법원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원행정처는 이 정보를 토대로 헌재 대응 논리 및 실행 방안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 부장판사도 이를 짐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 부장판사는 헌재 내부 정보를 이 상임위원에게 이메일로 보낼 때 ‘보안 유지’ ‘헌재 압박용’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양 전 대법원장 쪽은 ‘정보 유출’을 지시했는지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는 태도다. 이 상임위원은 헌재 파견 판사들과의 점심 자리에서 인사 평정 관련 언급을 한 기억이 없다면서도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의 지시는 인정하는 취지로 검찰에서 진술했다.
국회 재판 청탁 통로로까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사건은 판사 파견 제도를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대법원은 올해 1월 판사 출신 전문위원(일반임기제 2급)을 국회에 보내지 않기로 했고, 헌재 파견 판사도 최근 12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국회·헌재·감사원 등에 파견된 판사는 현재 16명이다.
판사 파견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파견 제도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들이 대법원과 헌재 판단을 일치시키는 구실을 맡으면 소송 당사자인 국민의 혼란을 줄일 수 있고, 전문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제도를 악용할 소지가 여전해 판사 파견 제도는 위태로운 경계선에 놓여 있다는 반론도 많다.
최 부장판사는 재판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두 기관은 관행적으로 정보를 교류해왔으며 공식 창구가 없는 상황에서 파견 판사가 그 일을 담당해왔다는 항변이다. 그는 “후회된다”고 말했다. “글쎄요, 지시같이 생각하고 하긴 했는데요. 물론 그때 거절했으면 어땠을까 후회도 됩니다. 용기를 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순간 관성이 생겨서, 또 많이 요구도 하셔서 보고를 하게 됐습니다.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해서 안 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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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2 06:43:11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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